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형관 전투 (문단 편집) === 팔로군의 유격전 방침 결정 === 전쟁 극초기인 1937년 8월 22일부터 8월 25일까지 열린 낙천회의(洛川会议)에서 [[마오쩌둥]]은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함과 동시에 국민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유격전쟁을 발전시킨다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회의 이후 [[팔로군]] 산하 115사단과 120사단은 옌시산의 명령에 따라 산서성 방어를 위한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어 129사단도 산서성에 진입했다. 일본군의 진격이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자 마오쩌둥은 9월 16일과 9월 17일 전보를 보내 홍군의 전부를 집중하여 유격근거지를 만들자고 했던 이전의 계획을 수정하여 넓은 지역에 걸쳐 유격대를 배치하라고 지시했다. 9월 21일, 일본군의 선봉인 5사단 21여단이 평형관으로 진출했다. 이날 [[주더]], [[런비스]], [[덩샤오핑]], [[쭤취안]]이 타이위안에 팔로군 본부를 설치하고 중국 공산당 북방국과 팔로군 행동방침에 대해 토론했다. [[류사오치]]는 화북에서의 독립적인 항전을 전개하기 위해 결전을 회피하고 유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산서, 하북, 산동에서 무장투쟁을 선동하자고 주장했다. [[마오쩌둥]] 역시 이날 [[펑더화이]]에게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 오늘 홍군은 결전 문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나 후에 자기의 훌륭한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자기의 장점을 발휘하게 되면 결정적 역할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장점이란 바로 정규전이 아니라 제대로 된 독립자주적 산지 유격전이다. 한편 일본군의 공세로 인하여 옌시산 부대가 옌먼관으로 철수하자 오대산으로 진주한 팔로군 본부는 [[허룽]]의 120사단에게 서쪽 방향으로 진출하여 옌먼관의 옌시산군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린뱌오]]의 115사단에게는 동쪽으로 가서 평형관으로 진군하는 일본군 병력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파일:팔로군평형관입성.jpg]]|| || 평형관을 통과하는 팔로군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